"또 우네요."
한낮,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린다. 이불 빨래가 힘들다고. 일상 속 누구나 겪는 사소한 피로인데 어떤 이유에선가 그 호소가 남편으로부터 저녁까지 이어진다. 낮에 걸려온 통화 중에 울음이 섞이더니, 저녁이 되자 남편이 먼저 다시 전화를 건다. "엄마, 목소리 괜찮네." 목소리만으로 어머니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 순간인 것으로 보인다. 화가 차올랐다.
보통 누군가 울 때 상대방이 안도하려면 상황이 호전됐다는 신호가 필요한데, 여기선 다르다. 울음 자체가 이미 효과를 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비단 이날뿐 아니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어 왔다고 느껴진다. 시어머니가 원하는 바가 생기거나, 관심을 받고 싶을 때면 눈물이 나온다는 생각이 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처음 한두 번이었다면 몰라도, 일관되게 그 눈물이 아들을 움직여 왔다. 남편은 그 울음에 동요하고, 헌신하고, 안도한다. 시어머니를 위해.
그런데 나는 어디 있나?
형제들이 어머니의 눈물에 약해지는 이유를 물었을 때 가슴이 철렁한 것으로 전해진다. 효심이라는 미명 아래 감정이 도구화되는 구조를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이를 '감정적 조종'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가스라이팅'이라 말한다. 모두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현상을 가리킨다는 인상인 것으로 보인다. 반복되는 울음이 상대방의 행동을 유도하는 패턴으로 굳어진 것 같다.
문제는 이 패턴 속에서 당사자(남편과 시어머니)보다 그 사이에 낀 사람이 먼저 소진된다는 데 있다고 보인다. 배우자가 부모와 나 사이에서 계속 부모 쪽으로 기울어질 때, 나는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넌 왜 또 우는 건데?"라고 묻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효도를 모르는 며느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는다. 울면 안 된다는 암묵의 규칙이 생겼다. 하지만 아들이 울면, 어머니가 울면 그들은 위로받는다. 이 이중 기준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 느껴진다.
만약 내가 울면 남편이 저렇게 저녁마다 전화를 걸어서 "괜찮네"라고 안도해줄까? 만약 내가 눈물을 도구로 삼으면, 일상의 문제들이 내 편의를 위해 움직여줄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관계가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홀로 남은 어머니와 효심 깊은 아들. 그 조합만으로도 이미 한 명의 배우자는 제3자가 돼버린다. 둘이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면 될 것을 굳이 그 사이에 나를 끼워 놓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자꾸 분노로 변한다.
📌 원문 발췌
별일도 아닌데 이불빨래하기 힘들다 낮에 전화통화하면서 시어머니가 울어서 저녁에 또 전화해서는 지금은 목소리가 괜찮네 하며 안도하는 남편을 보니 화가 치밀어올라요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