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삼십 일 남겨두고 신랑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흰색 봉투였다. 삼년을 사귀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서류는 신랑의 입에서 '자산 보호 계약서'라 불렸다. 신랑은 건설업 재벌가의 셋째 아들이고, 신부는 직업이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 집안 차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사랑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흔들린 건 봉투를 연 순간이었다.
계약서의 첫 번째 조항은 '재산의 완전 분리'였다. 결혼 전 각자 소유한 자산은 물론, 결혼 후 발생하는 모든 소득과 자산 증식분까지 각자의 명의로만 관리하겠다는 내용. 맞벌이를 하더라도 신부의 월급은 신부 통장에, 신랑의 수익은 신랑의 통장에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용 생활비만 일정액 각출하는 식으로 결혼생활을 운영하자는 제안이었다.
'재산 분할'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혼 시 꺼낼 수 없게 하려는 의도가 너무 명확한 것으로 전해진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혼 페널티' 조항이었다. 신부의 과실로 이혼하게 될 경우, 그 사이 신랑 측에서 제공받은 예물과 품위 유지 지원금, 신혼집 거주 비용까지 모두 '월세'로 환산해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결혼 생활이 십 년을 채우지 못한 채 파경으로 치닫는 경우, 신부가 먼저 이혼을 제기한다면 신랑에게 '시간 낭비에 대한 위자료'로 2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공증까지.
신랑의 설명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렸다. "우리 집안의 자산 규모가 크다 보니 리스크 관리가 생명이야. 이건 자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집안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일 뿐이야." 그는 신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자기가 나랑 평생 잘 살 생각이라면 이 종이는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
그 말의 논리에는 이상함이 숨어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만약 떨어진다면'을 대비하고, 그 시나리오에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손가락질당할 만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혼전계약서 자체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제도지만, 한국 민법에서는 공서양속에 반하는 조항의 효력을 제한한다. 이 계약의 실제 구속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계약 내용보다 계약을 강요하는 방식이었다. 신랑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인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결혼 승낙을 취소하겠대. 나도 어쩔 수 없어." 파혼을 무기로 한 최후통첩이었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명을 강요하는 방식이 정말로 '리스크 관리'일 수 있을까.
신부는 그 순간, 자신이 신랑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자산을 빼앗아갈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느꼈다. 삼년을 함께한 그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졌다. 계약서는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성격의 문서였다는 점이 역설적이었다.
📌 원문 발췌
결혼 생활이 10년을 채우지 못할 경우, 제가 먼저 이혼을 요구한다면 '시간 낭비에 대한 위자료'로 2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공증을 요구하더군요. '이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결혼 승낙을 취소하시겠대'라며 파혼을 무기로 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