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서빙으로 운영하는 음식점에 남편 가족과 함께 간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음식을 가져오는 일이 필요했고, 평소처럼 아무도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함께할 일이었다. 그런데 글쓴이가 음식을 담으려 하자, 시누이가 자신은 그 일을 못한다고 선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릴 때 음식을 나르다가 넘어진 뒤 모든 것이 쏟아지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봤던 그 순간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시누이는 그 말을 두 번 강조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글쓴이가 느낀 불편함의 핵심이 드러난다. 그 이야기를 왜 자신에게 말해야 했는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와 남편도 함께 있었다. 누군가는 음식을 가져올 사람을 지정할 수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누이의 선언은 마치 글쓴이를 향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못하니까 넌 가져와"가 아니었다. "너는 이해하겠지?"라는 무언의 압력이 그 말 뒤에 있었던 것 같다.

시댁 자리에서 누군가가 "내가 이걸 못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받는 사람은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암묵적 압력을 느낀다. 특히 그 말이 트라우마라는 무게를 달고 있으면, 더 이상 질문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글쓴이가 깨달은 것은, 그 이유의 타당성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문제는 그 이유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정당화하려고 작동하는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식을 나르는 일은 셀프 식당에서 모두가 함께하는 당연한 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혼자만 그것을 피하면,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더군다나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는 "새로운 가족"이기도 하다. 오래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신의 불편함을 당당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시누이의 말 앞에서 글쓴이도 공감이나 수긍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시어머니의 반응인 것으로 보인다. 시어머니는 그저 묵묵히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 상황이 "괜찮은 것"으로 처리되었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가족 내에서 어떤 발언이나 행동이 부모 세대에게 이의 제기 없이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곧 "타당한 이유"로 굳어진다. 시어머니의 침묵은 단순한 무반응이 아니라, 암묵적인 동의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글쓴이가 던진 질문들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깊다. "직장생활 어케 한대?"라는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아니 그 얘기를 나한테 왜 함?"이라는 질문에는, 가족 내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지를 되묻는 톤이 담겨 있다. 글쓴이의 불편함은 트라우마 자체가 아니라, 그 트라우마가 왜 자신을 향해서만 말해진 것 같은 느낌에 있었던 것 같다.

이건 시누이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가족 자리에서는 누군가의 "못한다"는 말이, 불편함보다는 차라리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바뀌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트라우마나 불편함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면, 그것에 불평하는 쪽이 오히려 "왜 그런 작은 일로 신경 쓰냐"고 지적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원문 발췌

시누이가 자기는 어릴 때 음식 가져오다가 넘어져서 음식이 다 쏟아지고 사람들이 다 쳐다본 트라우마가 있어서 음식을 못나른대. 아니 그 얘기를 나한테 왜 함?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