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중독자

그땐 내가 마케팅 일을 다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칼날 같은 빌딩에서 문을 박차고 나올 때, 나는 무척이나 도전적이었다.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고 자기개발은 숨쉬는 것과 같았으며 상위권이란 말로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늘 무언가를 배출하는 과잉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흘러오게 된걸까. 선배의 오래된 차 조수석에 앉아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고 있으면 내 미래 역시 머지않아 어딘가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그가 무척이나 매너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일반적인 회사의 40대 직장인들과는 어딘가 달랐고, 권위의식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 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사장에게 직접 소개를 받고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비록 그가 선배였지만 적어도 우린 파트너에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첫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그가 불필요할 정도로 잦은 차선 변경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차의 축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도착하기 전까지 얼마나 더 많은 차선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느냐인 것처럼 보였다. 타인의 감정은 물론이고 내 목숨과 그의 목숨, 그리고 도로 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와 처음 악수하며 인사할 때 그는 허리를 90도로 꺾었었다.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살아온 곳에서는. 말없이 달리던 그날 차 안의 그는 많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고, 어떤 각도에서는 아이처럼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상태로 그는 자신의 불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 시작했다.

"동남아 여자들이 그렇게 맛이 좋던데요?"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존댓말을 유지했다. "사장이랑 임원진이랑 다 같이 여자 불러서 마사지 받는데, 그게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더라구요. 이번 여름에도 출장 갈 테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 즈음 내 형식적인 맞장구가 그에겐 진심처럼 느껴졌던 걸까. 다만 그는 그 순간 이후로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회사가 야심차게 준비하던 대규모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는 조만간 핵심 경쟁 업체로 이직해 그 프로젝트를 그대로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계획만 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해당 업체 관계자와 이야기가 어느정도 오간 상태였다.

단지 왜 그렇게까지 괴리를 벌려놓는 것인지 그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선배도, 임원도, 사장도. 그럴 거라면 아내 이야기를 하며 울 필요도 없지 않았는가. 일개 직원인 나에게 뭐 그리 잘 보이고 싶었던 걸까. 난 몇 달 되지 않아 사표를 냈다.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작업하기로 했던 약속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모든 방향은 일방적으로 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사표를 내던 날 선배의 계획을 그대로 말했다. 회사가 준비 중인 핵심 프로젝트를 그가 경쟁 업체로 가져가려 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사장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말투 속 교양과 품위는 끝까지 유지했다.

이틀째였을까.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 선배를 잘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게 그가 맡기로 되어 있던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난 무언가 단단해질 만큼 짜릿했다. 기대감에 들떠 있던 얼핏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의 모든 계획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부서진 건 내 미래가 아니라 그의 낡아빠진 쇼바였다. 어느새 내 몸에 들러붙어 있던 구역질 나는 괴리감을 비로소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다.

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예의 그 아나운서 같은 톤으로 말했다. "아니오"


📌 원문 발췌

복수 중독자 그땐 내가 마케팅 일을 다시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칼날 같은 빌딩에서 문을 박차고 나올 때, 나는 무척이나 도전적이었다.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고 자기개발은 숨쉬는 것과 같았으며 상위권이란 말로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늘 무언가를 배출하는 과잉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흘러오게 된걸까. 선배의 오래된 차 조수석에 앉아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고 있으면 내 미래 역시 머지않아 어딘가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날도 우리는 차 안에서 말이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그가 무척이나 매너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배려하는 척하는 사람이라 느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회사의 40대 직장인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권위의식에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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