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현명한 사람은 다르다. 지식이 풍부하거나 경력이 많아도 현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의 성찰 글을 보면, 현명함의 조건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한 마디다.
어려서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유아기적 전능감이 있다. 자신의 생각이 절대 옳다고 여기는 시절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이면서 이 확신은 조금씩 흔들리는 게 자연스럽다. 10개 의견 중에 5, 6개 정도만 맞아도 대단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늦지만 찾아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성인이 되는 사람들도 많다. 자기확신이 강한 어른이 오히려 더 흔한 까닭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문장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생각해보자. 이 한 마디가 나오는 순간, 상대방과의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견을 절대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목소리에선 설득력보다 선언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반면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상대를 동등한 논의 상대로 대우하게 된다.
맞고 틀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하겠다는 방향성'인 것으로 보인다. 이 태도에서 토론과 선언의 차이가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순간, 대화는 끝나고 설교가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한 커뮤니티 사용자는 예전의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점차 '자신이 옳다'는 주장으로 점령되어가는 변화를 포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의 관찰은 온라인 커뮤니티 전반에서 감지되는 현상과 맞아떨어진다. 존중하면서도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점차 자신의 정당성만 입증하려는 일방적 주장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 이기주의, 지역 감정—이런 것들이 전면에 나올수록 더욱 그렇다.
글쓴이가 군 입대 시절 존경하던 한 어르신(625 참전 국가유공자)으로부터 받은 조언이 있다. 그것은 지역과 이념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담긴 발언이었다. 글쓴이는 그 순간 어르신에 대한 모든 존경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 자체에 대한 감정마저 흔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글쓴이는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 어르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남겨진 깊은 슬픔, 그로부터 나온 적개심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맥락이 보이자 동정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이해한다'는 것과 '배려 없는 말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귀중하다. 하지만 이해가 곧 동의이고, 동의가 곧 침묵을 의미해선 안 된다. 이해와 비판은 동시에 가능하다.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그 말은 배려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보이는 이데올로기와 이기주의의 반복적 대립은 결국 한 가지 전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확신이 내려놓아지지 않는 한, 진정한 대화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현명한 사람이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태도는 생각보다 훨씬 드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원문 발췌
내가 틀렸을수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더군요. 10개 중에 5개만 맞아도 대단하다는 걸 늦게나마 깨닫았습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