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믿어온 기독교인이 신을 의심한다. 이것이 갖는 무게는 단순하지 않다. 신앙 밖에서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회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릴 때부터 세운 신앙 위에 온전히 서 있던 사람이 그 토대 자체를 물어뜯으려 할 때, 거기엔 회의를 넘어 배신감과 자기부정의 감정까지 겹친다. 신을 믿지 않던 사람이 신을 의심하는 것과 신을 믿던 사람이 신을 의심하는 것. 겉으로는 같은 회의이지만, 내면의 층위는 완전히 다르다.
한 익명 게시판의 글쓴이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왔고, 성경을 신학적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학 논의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지식.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체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현현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기적 같은 사건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은 성경 안에만, 자신의 마음 속 신념 안에만 머물러 있을 뿐, 현실에서 검증 가능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겪은 구체적 답답함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지식과 실제 체험 사이의 극심한 간극.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과 삶에서는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없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신학책은 읽을 수 있고, 신학 논쟁에도 참여할 수 있지만, 기도 중에 느껴야 할 영적 임재감이나 기적적 경험 따위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깨달음. 오랜 세월 이 괴리와 씨름해왔지만,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했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더 복잡한 건 물리학과 성경의 충돌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이 근본에서 만나지 않는다는 느낌. 신학이라는 영역은 결국 철학의 범주로만 다룰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신은 더욱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로만 남는다. 실증 가능한 물질 세계의 법칙 앞에서, 신의 존재는 영원히 증명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려난다. 현실에서 검증 가능한 신의 증거는 전무했다는 그의 표현이 묵직하다.
이런 생각들이 야밤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인데, 이것이 중요한 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이 질문을 공개적으로 꺼내기 어렵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신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신을 믿고 싶지도 않은 그 절묘한 심정. 신앙심 깊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품는 의심은 더욱 금기처럼 취급되곤 한다. 누군가는 '당신이 왜 의심하냐'며 묻고, 다른 누군가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수십 년을 믿어온 사람의 의문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야밤에 뻘글로 터져나온 이 질문들은 결국 누구도 해답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자도, 목사도, 친구들도, 심지어 신 자신도 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답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신앙 안에 머물 수 있고, 회의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적어도 현재로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 속에서, 확신 없는 믿음으로라도 버티는 것이 누군가에겐 유일한 방식일 수 있다.
📌 원문 발췌
성경에 대한 이해도 신학적으로 기독교를 논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에 그 어떤 체험도 없습니다. 신이 나타난 적도, 성경에 많이 있는 기적적인 사건은 비슷한 것도 없었습니다.
원본 출처: 딴지일보 자유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