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의 한 발언이 수십 년간 오해받아 온 사건이 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세상을 돕는다'는 취지의 발언이 1990년대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저술가에 의해 '고통을 예찬한다'고 낙인찍혔고, 그 해석이 서구 대중에게 빠르게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종교학 및 신학 연구 커뮤니티에서는 이 발언의 원래 맥락이 훨씬 복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먼저 발언의 원문을 들어보자.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누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 덕분에 이 세상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고통 자체를 찬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히친스 같은 비판가들은 이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종교 연구자들은 첫 번째 문장의 진짜 의미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눈다'는 표현은 성경의 콜로새서 1장 24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분석인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톨릭 신학 전통에서 이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영성을 뜻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테레사 수녀가 말한 '아름다움'은 고통의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그 고통을 원망이나 분노 대신 영적 봉헌으로 바꾸려는 신앙적 결단을 가리킨다는 의미라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문장의 '도움'도 마찬가지로 신학적 맥락이 있다고 지적된다. 마태오 복음서 25장은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예수)에게 해 준 것'이라는 말씀을 담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이를 문자 그대로 믿으며, 가난한 이들을 만날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이라고 여겼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세상이 받는 '도움'은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돕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비심과 영적 각성을 얻게 된다는 의미라는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오독이 계속되는가. 문제는 신앙 언어와 세속적 독해 사이의 간극에 있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배경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은 문장을 읽어도 전혀 다른 의미를 받아들인다. 신학 전공자들은 수십 년간 이 발언의 원래 의도를 설명하는 논문과 해석을 제시해 왔지만, 대중에게는 히친스의 '가학적 테레사'라는 프레임이 더 강하게 각인된 상태다.
물론 이 신학적 재해석이 테레사 수녀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의료 시설 환경, 신학적 신념과 실제 운영 사이의 괴리, 빈곤 해결 방식에 대한 현대적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도 있다. 발언 당시와 달리 현대에는 빈곤을 '영적 기회'로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구조적 불의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도 그렇다. 그러나 이 특정 발언만 놓고 보면, 그것이 단순한 고통 예찬이 아니라 신앙 전통 안에서의 영적 담론이었다는 측면은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종교학계의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발언의 원래 맥락을 알았을 때 독자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진다.
📌 원문 발췌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나누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 덕분에 이 세상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