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사 부조는 상호성의 원칙 위에 오래 세워진 관습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의 슬픔에 참석했으니 너도 내 기쁨에 나올 것이라는, 암묵적 계약 같은 것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원칙이 깨질 때 생기는 불편함이 바로 한 익명 게시판 글쓴이와 친구 사이에 터져 나왔다.
글쓴이에 따르면, 친구가 2년 전 조부모상을 겪었을 때 자신은 가지 않았다. 조부모의 상례에는 참석하지 않는다는 개인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글쓴이만의 기준이었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예외를 두지 않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올해 겨울 그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글쓴이는 청첩장을 받고 축하할 생각으로 참석 여부를 고민하던 참에 친구에게 예상 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상례와 혼례를 같은 무게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친구가 자동으로 따라야 한다고 기대하는 게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사실 경조사 부조의 기준은 그간 크게 변해 왔다. 조부모상이나 먼 친척의 상례에 참석하는 범위가 세대나 개인에 따라 달라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조부모나 친척의 장례식이 곧 가족 행사였지만, 요즘은 "나는 직계 부모의 상례만 참석한다" 또는 "조부모라도 돌아가신 지 오래라면 안 간다"는 식으로 개인의 기준을 따로 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자체는 존중받을 만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반응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기준이 암묵적으로만 존재할 때다. 글쓴이가 조부모상에 가지 않는 이유를 친구에게 미리 설명해 두었다면, 친구 역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청첩장을 받은 후에 나온 말은 다른 의미로 읽힌다.
친구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서운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준을 맞춰보자는 신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상례와 혼례를 동등하게 놓으려는 친구의 논리는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친구 역시 "왜 내 가족의 죽음은 너에게 중요하지 않은데 내 결혼은 축하해 달라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이 갈등의 핵심은 경조사 참석 기준을 개인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 기준을 정했을 때 상대방과 얼마나 솔직하게 소통했는가라는 쪽으로 옮겨간다. 한쪽은 자신의 기준을 일관되게 지켰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무시당했다고 느낀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미리의 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조사 부조에 관한 한 '상호성'은 상당히 위험한 개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방적으로 상대의 기준을 추측해서 "넌 내게 이 정도 의무가 있어"라고 정하는 식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가 다르게 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친구가 서운해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둘 다 먼저 말을 꺼냈어야 했다는 점에서, 이 갈등은 예방 가능했을 법하다는 반응이 나올 법하다.
📌 원문 발췌
너도 안왔으니까 자기도 축의는 안할건데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