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크기에 풀 쿼티 키보드를 갖춘 클램쉘 형태의 PDA, 사이온 레보(Psion Revo). 1999년 출시된 이 기기는 당시 상당히 독특한 기기로 여겨진다. 오늘날의 스마트폰만 알고 자란 이들에게는 낯설겠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손안의 컴퓨터라는 개념으로 각축하던 기기들이 있었다. 특히 사이온 레보는 EPOC이라는 자체 운영체제를 탑재하고, 진짜 글을 치는 물리적 키보드를 손가락 위에 구겨 넣어 실용성과 개성을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이단아로 평가받는다.

PDA 시장은 한때 흥미로운 다양성의 장이었다고 평가된다. 팜 파일럿(Palm Pilot)은 터치펜 기반의 간결함을 추구했고, 포켓PC는 윈도우 계열 운영체제로 기존 PC 사용자들을 끌어들였다. 블랙베리는 이메일과 메시징에 특화한 QWERTY 키보드 기기로 비즈니스 사용자의 손에 쥐어졌고, 사이온은 또 다른 운영체제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각 제조사와 플랫폼이 저마다의 철학을 가지고 경쟁하던 이 시대를 '춘추전국 시대'라 부르는 관점이 있다. 아무도 정해진 형태가 없었고, 누구도 먼저 도달할 정답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다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터치스크린 중심의 슬레이트 형태는 생각보다 강력한 표준이 되었으며, 이후 출시되는 스마트폰들도 거의 같은 형태를 따라갔다. 당대 기준으로는 터치식이 혁신적이어서 모두가 그 방향으로 수렴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재 관점에서는 거대한 다양성을 일시에 포기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블랙베리의 물리 키보드, 사이온의 클램쉘 디자인, 각 플랫폼이 추구하던 다양한 인터페이스들이 스마트폰 표준화 과정에서 거의 소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키보드를 단 기기들의 퇴장이 아쉬워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팜은 스타일러스 기반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생존하지 못했고, 블랙베리는 스마트폰 시장 초반 꽤 오래 버텼으나 아이폰이 보급화되면서 비즈니스 영역까지 침투해 점차 희귀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사이온은 더 빨리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모두 훌륭한 기기였지만, 스마트폰이 정의한 새로운 기준에 부응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기기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팜은 심플함을, 포켓PC는 호환성을, 블랙베리는 생산성을, 사이온은 또 다른 가능성을 각각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스마트폰들도 좋지만 외형상으로는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획일화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레트로 기술 커뮤니티에서 과거 PDA들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하는데, 그 시대는 누구도 '이게 표준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제하지 않았고, 각 기기가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담아 시장에 나섰다는 점이 지금과 가장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


📌 원문 발췌

스마트폰에 밀려 PDA라는 시장은 완전히 사라졌죠. 키보드 묻은 팜이나 블랙베리 조차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아이폰이후 모든 스마트 기기들이 다 비슷해보이지만, 이 당시는 다양한 개성을 뽐 내는 디바이스가 많았죠..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