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 가 암 정복을 향한 진전을 공개했다는 뉴스가 나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학 기술의 발전을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정말로 모든 인류에게 축복이 될까?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은 이 희망의 뉴스 뒤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오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모두에게 같을 수는 없다는 문제의식인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안정성 없이 오래 산다는 것의 무게는 남다르다. 평생을 최저임금 수준에서 허덕이며 살아온 사람이 의학 기술의 덕분에 추가로 20년, 30년을 더 산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글쓴이는 이 질문에 대해 깊은 회의를 표한다. 재정적 여유가 없는 평민에게 수명 연장은 오히려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건강 유지에 드는 의료비, 요양 비용, 생활비까지 증가된 기간만큼 짊어져야 한다. 자신이 오래 살수록 자식 세대에 짐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생긴다. 결국 개인의 의학 기술 수혜는 가족 공동체 전체의 경제적 압박으로 전이되는 구조인 셈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민은 한 개인의 독백으로 시작되지만, 사회 구조의 모순을 건드린다. 안락사 합법화 논쟁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같은 국가에서는 이미 법적 제도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성인의 자기결정권, 특히 고통 없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곳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여전히 법적·사회적 금기에 가까우며, '생명의 가치'라는 절대적 명제 앞에서 개인의 선택권은 논의 대상이 되지 못해 왔다.

글쓴이가 제시하는 '적극적 안락사' 개념은 단순히 죽음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강요 없이, 충분히 생을 산 성인이 스스로의 삶의 질을 판단하고,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권리를 인정하자는 의견인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불안 속에서 오직 일만을 반복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 품위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인간 중심적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의견에는 비판이 따른다. 생명 경시 논쟁이 나올 수 있고, 사회적 약자가 더 쉽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유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타당하다는 반응이 있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 글은 기술 진보의 불공정한 분배를 지적하는 것으로 읽힌다. 암 정복이라는 신약이 개발되더라도, 그 혜택을 가장 먼저 누리는 것은 누구인가? 권력층과 부자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평민의 자식들은 이 새로운 기술 시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AI와 의료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할수록, 낮은 임금의 일자리는 더욱 줄어든다는 우려가 있다. 결국 부자들은 더 오래 사는 특권을 얻고, 빈곤층은 오래 사는 것이 부담이 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온다는 예견이 깔려 있다.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성찰인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가 늙고 약해지면 죽을 준비를 위해 따로 떠난다는 자연의 이미지를 빌려, 글쓴이는 조용히 혼자 마감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표한다. 자신이 죽은 자리에 들꽃이나 한 송이 피었으면 한다는 표현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죽음, 자연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염원하는 심정을 드러낸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터부시되는 '자기결정권으로서의 죽음' 담론의 실제 목소리라는 점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결국 암 정복이라는 축하할 뉴스 뒤에는, 기술이 모두를 위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이 깔려 있다. 수명 연장 기술도 결국 누가 그 혜택을 누리는가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제기하는 안락사 선택권 문제는 의료 기술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난제로 읽힌다.


📌 원문 발췌

***가 암을 정복한다고 한다. 생활비 병원비 충분하면 참으로 좋은 뉴스겠지만 빈털털이 평민들에겐 그거 맞고 오래사는 게 축복일까 하는 생각이 들거라 본다.

원본 출처: 딴지일보 자유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