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말하는 입장이 오히려 더 냉혹하게 느껴진다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가 이런 문제의식을 제기했는데, 그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이 비슷한 답답함을 경험하고 있을 것 같다.
***지역의 고령층이 종부세 부담으로 오랫동안 살던 집을 처분하게 되는 상황에서, 일부 여론은 "분수에 맞게 외곽이나 지방으로 이주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한다. 전월세 시장의 급등으로 세입자들이 주거비 압박을 받을 때, "현실적인 지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식의 조언이 따라온다. 또 범죄의 피해자들에겐 "그런 시대 흐름은 어쩔 수 없다"며 무언의 감내를 종용한다.
이 세 가지 상황을 나란히 두고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눈에 띈다. 모두 이미 고통을 겪고 있는 개인들을 향해 있다는 거다. 대의를 내세운 주장들이 결국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그것이 시대의 필연이니 받아들이라" 또는 "더 큰 그림을 위해 양보하라"는 형태다. 누군가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원칙이나 변화 과정의 불가피한 댓가로만 취급되는 셈인 것으로 보인다.
이 구조가 불편한 이유를 명확히 말하면, 정의나 원칙을 내세우는 주장일수록 피해자의 구체적인 사정이 지워진다는 거다. 종부세 정책의 필요성을 말할 때, 세입자 주거 안정의 중요성을 말할 때, 범죄 예방의 효율성을 말할 때—각각의 주장에는 그나마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건 "누군가는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더 문제적인 건, 그 누군가가 단순한 통계 숫자가 아니라 현실의 노인이고, 직접 이사를 다니는 세입자고, 여전히 후유증을 겪는 피해자라는 거다. 원칙을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서, 개별 사람들의 고통이 정당화되거나 무시당한다.
더욱 눈에 띄는 발견은 이 패턴이 특정한 이념이나 진영에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 논리에서도 진보적 논리에서도 반복된다. 시장 원리를 내세울 때도, 사회정의를 내세울 때도 비슷한 구조가 작동한다.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정의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 정의를 지키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역설적이지만, 정의를 말할수록 개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은 더 멀어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리감이 커질수록, 담론은 점점 설득력을 잃기 시작한다.
정의 담론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 같다. 대의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변화 속에서 누가 구체적으로 상처받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마주칠 때, 논리의 냉혹함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느껴진다. 원칙과 개인의 고통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만 다뤄질 때, 남는 건 공감이 아니라 분열인 것으로 보인다. 정의를 내세울 때일수록, 역설적이게도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개인의 목소리가 더욱 진지하게 들려야 하지 않을까. 그 개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더 큰 정의"를 말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원문 발췌
종부세 부담의 *** 노인들에게 '집을 팔고 지방으로 가라', 전월세 세입자에겐 '분수에 맞게 외곽으로', 범죄 피해자에겐 '시대 흐름이니 어쩔 수 없다'며, 결국 피해자들더러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는 식의 논리.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