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부였다. 소득은 비슷했고, 아기가 생겼을 때 친정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주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계획은 예고 없이 깨졌다. 임신 중에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출산 후 산후우울증이 밀려왔다. 신체적 회복도, 심리적 정리도 겨우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실은 유아용품 교환과 분유 보충의 연속이었다.
생각이 정리되면서 깨달음이 왔다. 자신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가정이 유지된다는 것. 아기가 4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과 함께 어린이집을 선택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기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다녔다. 양쪽 부모의 출근·퇴근 시간을 맞춰낸 결과였다. 시간을 쪼개고 일정을 재구성한 끝에 나온 결정이었다. 아기는 건강하게 성장했고, 같은 해 동안 아무 큰 문제 없이 어린이집 생활을 이어갔다.
문제는 친구에게서 나왔다. 친구도 올해 아기를 낳았는데 벌써 6개월이 되어 있었다. 친구는 글쓴이의 선택을 듣고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너 독하네.' 글쓴이가 조건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친정어머니를 잃고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남편과 함께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자 친구는 손을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며. 하지만 상처는 이미 남아 있었다.
그 후 친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더 직설적이었다. 아기가 어릴 때 어린이집 대신 더 고생하면, 아기와 더 깊은 애착이 형성된다는 것.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낸 건 자신의 편함 때문이 아니냐는 의문. 그 한마디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친정어머니 사망 이후 힘든 과정을 모두 목격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조건은 외면한 채 선택만 판단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지점이 있다. 친구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육아를 진행하고 있었다. 돌 이후에 어린이집을 보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아기 육아' 상황이라는 이유로, 마치 선택지가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가정 속에서는 글쓴이도 본인처럼 '더 참으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선택이란 실은 없었다. 조건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조건. 지원해줄 친정이 없다는 조건. 심리적 어려움도 함께 싸가야 한다는 조건. 이 모든 것이 어린이집 결정을 '선택'이 아니라 '현실 대응'으로 만들었다.
육아 선택을 둘러싼 비판이 유독 엄마에게만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의 남편도 같은 소득으로 일하고 있고, 같은 결정을 공동으로 내렸다. 하지만 '아빠가 일을 나갔다'는 표현은 누군가의 죄처럼 들리지 않는다. 반면 '엄마가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냈다'는 표현은 쉽게 무언의 판단으로 변한다. 이 차이가 바로 조건을 선택으로 다시 읽는 구조다. 같은 상황도 성별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월령 기준이나 애착 형성 이론보다 먼저 봐야 할 게 있다. 그 선택을 강제한 조건이 무엇인지다. 친정을 잃고, 지원망이 없고, 일을 계속해야 하고, 심리적 어려움까지 있었다면, 그건 더 이상 순수한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더 고생하면 된다'고 말한다. 마치 고생이 엄마의 의무처럼, 당연한 도덕인 양. 이것이 조건을 보지 않고 판단하는 순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판단은 주로 엄마에게만 향한다는 점이 이 구조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 원문 발췌
아는데 엄마 돌아가시고 힘든거 다 본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요. 너가 좀 더 고생하면 아기는 엄마랑 애착도 더 형성되고 좋은데 너 편하려고 목 겨우 가누는 애 보낸거지 않냐 하더라구요.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