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를 낳은 건 36살 때였다. 요즘 기준으로는 그리 늦지 않은 나이지만, 실제로 그 나이에 태어난 자녀로서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만들어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엄마의 신체적 한계였다. 또래 친구들의 엄마는 늘 에너지가 넘쳐 보였는데, 우리 엄마는 맨날 피곤해하곤 했다. 일찍 깨는 것도, 저녁까지 아이를 챙기는 것도, 나의 요구에 응하는 것도 모두 버거워 보였다. 그 피로감은 고스란히 내게 향했다. 작은 일에도 짜증내곤 했고,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으며, 왜 이런 것도 이해 못 하냐며 답답해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엄마의 나이와 체력 때문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 단지 엄마가 나에게 화를 낸다고,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세대 차이는 성장하면서 더욱 두드러져 갔다. 엄마와 나는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마치 다른 시대에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고, 옳다고 여기는 가치도 전혀 맞지 않았다. 나의 진심이 엄마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곤 했고, 그 차이는 자주 싸움으로 번져 나갔다. 부모님 세대와의 이별, 혼자만의 시간의 필요성, 외모나 진로에 대한 선택지 같은 것들. 이 모든 것이 마찰의 지점이 되었다.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을 때마다 내 마음은 한 번 더 뒤틀렸다. 교실에 들어오시는 다른 엄마들은 죄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들은 최신 유행도 따라가고, 아이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러워 보였으며, 다른 부모들과도 편하게 어울렸다. 반면 우리 엄마는 항상 그 바깥에 있었다. 나이로 인한 에너지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 엄마만 왜 다르지?' '왜 다른 애들 엄마는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부러움도 있었고, 이질감도 있었다. 그런 감정들은 마음 어딘가 깊숙이 자리 잡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 나는 서른이 됐다. 엄마는 거의 일흔 가까이에 이르렀다. 가장 활동적이고 또 가장 많은 것을 시도해야 할 내 나이와, 이제 남은 시간을 헤아리고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엄마의 나이가 동시에 존재한다. 어린 시절엔 느끼지 못했던 현실이 지금은 무겁게 드러난다. 늦은 출산이 가져온 가장 치명적인 결핍은 다름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여행도 가고, 깊이 있는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엄마가 충분히 건강하길 바라며, 나이 들어 의지할 수 있는 부모가 있길 원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너무나 부족해 보인다. 엄마도, 나도.
어떤 사람들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결정을 이기적이라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입장에서 판단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 내 경험에서는, 늦은 출산이라는 선택이 남긴 것이 누군가의 이기심이기보다는, 시간 차이가 만드는 불가피한 간극이자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다.
📌 원문 발췌
체력 딸리니 맨날 피곤해하고 짜증은 다 나한테 내고 세대차이가 너무나니까 생각하는게 아예달라서 싸움도 잦음. 난 이제 한창인데 엄마아빠는 이제 거의 일흔임.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