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일방적으로 강요되어 왔는지를 깨닫는 순간은, 대부분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너도 나중에 부모가 되면 이해할 거야",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 말들이 무게처럼 자신의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정작 자식을 키워보니, 상황은 정반대였다. 자식을 낳아볼수록, 부모 세대에 대한 의문은 더 깊어졌다.

비교의 충격은 예상 밖이었다.

저자가 겪었던 사춘기는 격렬했다. 방문을 닫고, 엄마를 거부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에게도 같은 반항을 당할 것으로 예상했다.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저자의 아들은 방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엄마가 집에 오면 반갑게 달려와서 연신 말을 걸었다. 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그 차이는 양육 방식에서 나왔다. 저자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다르게 대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이의 인격을 모욕하지 않았다. 비아냥거리거나 초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선을 지키고 존중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여전히 효도를 강요한다.

"도시락을 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말을 자녀의 의무로 돌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다. 자신의 의지로 낳은 아이에게, 가혹한 세상을 견디도록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은 생색낼 일이 아니다. 저자는 자식을 키우면서 그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를 위해 10을 들었다고 해도, 아이가 받는 심리적 부담은 몇십 배가 된다. 그런 기본을 생색내는 것은 부모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감정 쓰레기통의 소진이 시작된다.

"더 자주 전화해. 더 자주 와. 엄마한테 더 따뜻하게 해." 반복되는 효도의 강요, 이전 세대가 그래왔다는 이야기, 다른 아이는 왜 그런데 너는 왜 그러냐는 비교—그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어느 날부터는 감정의 우물이 바닥이 난다.

이유를 설명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 엄마는 너한테 잘했냐"고 물으면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한다. 수십 년 전 일을 들며 정당성을 묻으면 "이제 늙은 엄마를 괴롭히냐"며 역으로 책임을 뒤집는다. 부모가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냐는 말로, 자녀는 더 이상 감정 노동을 할 여유를 잃는다.

만약 저자가 같은 나이가 된다면, 자신의 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다. 아들이 누군가를 욕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 감정을 받아주되 자신의 마음을 아이 위에 쏟아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아이는 그 기억과 함께 수십 년을 더 살아가야 하니까.

아동심리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다. 안정적인 애착과 인격적 존중이 형성될 때, 자녀는 자발적으로 부모에게 다가온다. 심각한 학대를 받은 아이들조차도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를 피하게 되는 것은 불효가 아니다. 상처를 입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일 뿐이다.

효도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결과물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푼 인격적 존중과 사랑이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온다. 이제 3040 세대는 자신의 원가족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했던 기준을 찾기 위해,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명확해진다. 부모라는 위치가 자동으로 주는 권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효도라는 의무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들어낸다는 것 말이다.


📌 원문 발췌

자식이 클수록 효도는 의무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인격적 존중과 사랑이 돌아오는 부메랑인 것 같다.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