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결혼을 잘하겠다는 철학관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고 예뻤어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어딜 가나 피팅 모델이냐는 소리를 들었고, 선생님들도 저를 많이 예뻐했습니다.
학벌은 인서울 끝자락이지만 무난한 대학을 나왔고, 아버지는 노후 준비가 되어 있는 공무원에, 부동산이 운 좋게 잘되어서 20억 초반 아파트에 살고 계세요. 대단한 집안은 아니어도 딱히 흠잡힐 만한 조건은 없었어요.
전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마음이 조급하던 서른 살의 겨울, 회사의 비전도 딱히 없어보였을 때 부모님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코스닥 기업 집안의 아들로, 부모님이 지분을 많이 가진 대표였어요. 조부모 이전부터 대대손손 잘사는 집안에 학벌도 좋아서, 조건만 따지면 저에게 과분했습니다. 조건이 좋은 대신 나이도 꽤 있고 외모는 별로일거라 감안하고 나갔는데, 웬걸, 제가 좋아하는 배우 ***을 닮은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옷도 잘 입고, 매너도 좋고 성격도 유머러스했습니다. 만나다 보니 잘 맞는 부분도 있었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어요.
남편 쪽에서도 처음 만날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고 했고, 만나는 내내 계속 확신을 주어서 믿음직스러웠어요. 다만 남편이 업무 때문에 해외에서 1년 정도 살아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동거를 하는 건 어떻냐고 제안했어요. 대신 식장을 바로 잡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남편과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동거는 제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여자인지 보는 테스트였던 것 같아요. 저는 남편의 생활 패턴에 맞춰 밥하고 장 보고 청소하고, 생활비는 넉넉히 줬지만 사치는 안 했어요. 남편은 계산적이고 신중해서 허투로 결정하지 않거든요.
결혼을 할 땐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동기들이 ***에서 프로포즈 링을 맞출 때, 저는 ***로 받았고, 예물로 명품 가방과 시계, 목걸이도 따로 받았습니다. 남들은 동네 예식장에서 공장형 저가 결혼식을 올렸지만, 저는 국내 최고의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을 신혼집으로 썼는데, 한강이 보이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곳이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느새 저는 결혼 하나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게다가 저를 질투했던 친구들은 저희 집안이 기우는 결혼이라고 시댁 반대가 심할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전혀 없었어요.
당시엔 시부모님의 환대에 마냥 기분이 좋았는데,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남편은 저 이전에도 병원장 딸, 교수 집안 딸 같은 좋은 집안 여자부터 아나운서, 약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까지 소개를 많이 받았더라고요.
처음엔 그들 중 제가 외적으로 가장 예쁘고 매력 있었기에 저를 선택한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모가 저보다 못하냐? 당시 소개팅했던 아나운서 한 분의 이름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저보다 더 예뻤거든요. 그때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아요. 남편이 날 고른 이유는 내가 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적당히 괜찮고 인내하며 살 수 있는 여자라서였구나.
그 추측은 결혼 생활이 지날수록 증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최우선순위가 아니에요. 부모, 회사, 친구, 거래처가 먼저고 저는 늘 뒷전입니다. 평일에도 온갖 모임과 접대, 주말에는 골프 약속, 가끔 시댁 모임까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턴 제가 이 집안의 가전제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안정적이고 깔끔한 집안을 유지하는, 군말 없는 가전. 집은 늘 청결하게 유지해야 했고 옷차림도 그랬어요. 머리 풀어헤치고 목 늘어난 잠옷 입고 다니는 걸 너무 싫어해요. 여자가 살찌는 것도 혐오하고, 결혼 생활 중에도 이성적인 매력을 유지해야 했어요. 몇 년이 지나니 불편하고 숨이 막혀왔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갑을 관계도 명확해서 남편이 여비서와 집 근처 고급 식당에서 단둘이 저녁을 먹는 걸 알아도 뭐라 못 하고, 따져 물으면 적반하장으로 "그럼 집에 데려와서 보여줄게"라고 말하곤 오히려 싫은 기색을 보여요.
시댁에 가면 잡일도 다 제몫입니다. 형님이 있지만 나이 차이도 꽤 나고 해외 출장이 많아서, 저와 달리 형님은 어마어마한 생활비를 받습니다. 백화점 VIP, ***과 *** VIP로 행사에 매번 초청받고요. 그런데도 제 남편은 저한테 본인의 기준 안에서만 소비하게 합니다.
피부 관리, 네일아트, 의류 같은 개인 소비는 체면을 상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만 허락해요. 고가 코트나 가방 같은 명품은 남편이 가끔 주는 선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 선물도 절 사랑해서 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본인 체면을 위해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 하고 다니라는 뜻이 큰 거겠죠.
그걸 깨달은 시점부턴 저는 한없이 외로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남편에게 맞출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더 냉대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남편은 결혼 생활의 만족도가 높을 때만 저에게 선물하고 외식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땐 전혀 챙기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총애에 따라 후궁의 식사와 생활이 달라지듯, 저는 남편의 기분과 만족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