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만난 형님과 다음 계절을 기약했는데, 가을이 되자 연락이 끊긴다. 답장도 늦어지고, 목소리도 가파르다. 병이 나빴나 보다. 한두 달 떨어져 있는 사이, 누군가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갔고, 누군가는 그럴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관계란 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거'되는 경험. 이게 나이 든다는 것의 핵심이 아닐까.

젊을 때의 이별은 선택이었다. 친한 친구와의 다툼, 헤어지는 연인, 회사를 옮기며 멀어진 동료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선택에 책임감을 느꼈고, 나름 애도의 의식을 거쳤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마주치는 이별은 다르다. 상대방의 건강 악화, 경제적 형편의 악화, 아니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죽음까지. 내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이 사라진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슬픔보다 더 정체 모를 무력감이다.

지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는 방식도 명확하다. 누군가는 갑자기 소식이 끊기고, 누군가는 만성질환으로 점진적으로 멀어진다. 누군가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모임에 나올 수 없다고 조용히 입을 다문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극단적인 이별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치는 빈도가 늘어난다. 그것들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조용히 쌓여간다.

이런 감정을 풀어놓을 곳이 부족한 현실도 있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이런 생각을 한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사실 요즘 외로워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익명 커뮤니티를 찾는다. 여기서 타인과 공명하는 경험이 위안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슬픈 경험담을 읽으며 내 슬픔도 증폭되곤 한다. 혼술과 익명 게시판. 이제 이것이 감정을 소화하는 최후의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갱년기인가 하는 자조 한마디에도, 사실 무언가가 담겨 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마음도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호르몬 탓일까? 주변 인연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현실을 목격하며, 자신의 존재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아닐까. 웃음으로 덮으려 해도, 그것은 절반의 진심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무력함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덧없고, 관계는 언제나 어떤 이유로든 소거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와 연을 유지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 무력감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연락이 끊긴 형님에게 일단 메시지를 보낸다. 혼술도 계속하겠지만,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으려 한다.


📌 원문 발췌

봄에 만난 형님 이번 가을에 만나기로 한 형님이 많이 아프신지 연락이 많이 힘드실걸 보니 착잡합니다. 집에서 혼술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게 그나마 클리앙이라는게 위안도 되고 슬픈게 증폭되기도 하고..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