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의 한 누리꾼은 신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신자였다. 같은 성당을 다니던 남자친구와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초반에는 둘 다 신앙적 정절을 지키려 했으나,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 자제력이 무너졌고 육체적 관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는 같은 성당 다니는 다른 여신자와 바람을 피웠다. 배신감만 남지 않았다. 그 이후의 현실이 더 심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이별은 일반적인 이별과 다르다. 보통은 관련 장소를 피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 하지만 성당 같은 종교 공동체에서는 계속 같은 공간에 모여야 한다. 미사, 신앙 모임, 행사 — 모두 그곳인 것으로 보인다. 떠날 수 없고, 버려준 상대와 그의 새로운 상대를 마주쳐야 한다.

더 절망적인 부분은 이 경험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감각인 것으로 보인다. 누리꾼은 "차마 고해성사조차 못하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해성사는 신앙인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유일한 창구인데, 그 창구 자체가 차단된 느낌이 든 것으로 보인다. 신부 앞에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수치심, 자신을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죄책감이 신앙 실천 자체를 방해해버렸다.

남은 것은 깊은 고립감인 것으로 보인다. 배신으로 인한 자존감 하락은 당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 "내가 정결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종교적 자책까지 더해진다. 누리꾼이 반복한 "더럽혀졌다, 하찮다, 버려졌다"는 표현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지점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누리꾼의 질문은 "제가 다시 정결해질 수 있을까요?"였다. 그 안에는 두 가지 고통이 섞여 있다.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 물음과, 신앙적으로 깨끗해질 수 있느냐는 영혼의 질문 말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있다. 자신을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것은 상대의 배신 때문이지,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영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현실이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자기 부정으로 고착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상기할 가치가 있다. 더구나 정절 여부가 한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 상황은 심각하다. 같은 공간에서의 마주침, 말할 곳 없는 고립감, 자존감의 완전한 붕괴.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분명하다. 신앙적 위로가 필요하다면, 신부와의 대면보다는 심리 상담사나 신앙과 심리를 함께 이해하는 전문가와의 만남이 도움이 될 수 있어 보인다. 외부 판단 없이 자신의 감정과 신앙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 원문 발췌

그 남자친구가 성당에 다른 자매랑 바람을 피워서 제가 버려졌는데 어디다 말도못해요. 차마 이런 내용은 고해성사조차 못하겠어요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