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을 10년 만에 다시 펼치면 흔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진다. 만화 '기생수'는 그 차이가 특히 극적이었다.
소년 시절 처음 읽었을 때는 신이치의 눈으로만 세상을 봤다. 정체 모를 기생수들의 추격,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의 몸부림. 오른쪽이는 신이치를 돕는 조력자 정도로만 여겨졌다. 공포 속에서 생존이 최우선이 되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관점에만 눈이 고정된다.
30대에 다시 펼쳤을 때였다. 뭔가 달라져 있었다.
이번엔 오른쪽이가 보였다.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기생수가 신이치를 왜, 어떻게 계속 지키는지. 그것이 얼마나 순수하고 일관된 헌신인지가 눈에 들어온다. 작품을 돌아보니 오른쪽이는 신이치에게 거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위험을 경고할 뿐이고, 신이치가 스트레스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이었다. 부모보다도 더 깊은 책임감으로 신이치의 안전을 챙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신이치의 변화도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기생수 세포가 신이치 몸 안에 들어오면서 그도 더 이상 완전한 인간이 아니게 된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디에 속하는지도 불명확한 혼란이 찾아온다. 어렸을 땐 단순한 공포 장치로만 느껴졌지만, 나이 들어보니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비극으로 읽혔다.
기생수들 자체를 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젊을 땐 그들이 반드시 제거해야 할 해충 같은 존재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재독할 때면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그들도 어떤 숙명에 따라 태어난 생물이며, 인간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운명을 짊어진 피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신이치와 인간들이 기생수에 대항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일까. 이 질문이 생기는 순간, 작품 전체가 철학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결말이 많은 독자들에게 눈물을 자아낸다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간다. 신이치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그리고 오른쪽이의 끝없는 희생이 축적되어 폭발하는 순간. 감정이 없다던 기생수가 결국 인간들이 하는 그 모든 헌신과 사랑을 몸으로 실천해낸다는 아이러니. 장편 만화의 스펙터클을 넘어서, 초인간적 설정 속에서 인간적 공감을 극대화한 구조 자체가 독자를 울리는 것 같다.
같은 장면을 두 번 읽어도 완전히 다르게 울린다. 어릴 땐 놓친 오른쪽이의 침묵의 보살핌, 신이치의 고통, 두 세계가 충돌하면서 만드는 철학적 질문들. 그것들이 이제 선명하게 다가온다. 기생수는 장르 만화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작품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긴다. 그것이 재독서의 선물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야기를 성장 후 다시 보는 경험이, 결국 내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