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한 익명 커뮤니티의 실제 고민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가족들 모두 알고 있다. 진단 당시 의사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암 전이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었다. 완치라는 길은 이미 포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족은 결정을 내렸다. 남은 시간을 함께 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식으로. 따라서 2시간이라는 거리는 더 이상 먼 거리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때로는 열흘에 한 번. 짧은 방문도, 일박 이상의 묵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함께였다.
12살인 그 손녀는 할아버지의 첫 손녀였다. 다른 손자들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유독 딸을 예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차이를 감지했는지, 할아버지 곁에 있을 때는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만 만나면 옆에 안긴 채로 움직일 정도였다. 곁에서 보면 둘 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마치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있을 때 가장 편해 보였다.
어머니가 따로 불렀다. 딸이 할아버지를 잃은 후 큰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이라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도 그 부분은 함께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진짜 고민은 따로 있었다. 그저 불안감만으로는 답을 낼 수 없는 종류의 문제였다.
발인 전,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 자리. 초등학생 딸을 그곳에 들어보내야 할까. 충격이 클 수 있다. 15살이었다면 다를 텐데, 아직 어린 아이가 그 장면을 마주했을 때 받을 충격을 상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울 수도 있고, 놀라서 움직일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다른 걱정이 생겼다. 역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어른들의 판단만으로 못 보게 한다면? 결국 아이에게 남는 것은 작별을 하지 못했다는 감각일 수 있다. 왜 자신만 못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순간의 충격보다 더 큰 상실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도 상담 현장에서는 배제된 아동이 장기적으로 더 심한 미해결 상실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충격과 상실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이 고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많은 부모들이 직면하지만 미리 생각해본 적 없는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참여를 막을 것인지, 참여시킬 것인지라는 이분법도 사실은 함정이 있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일 수 있다. 미리 충분히 설명해주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아이가 참여할 때도, 하지 않을 때도, 그 선택이 아이의 이후 애도 과정을 좌우할 수 있다. 이미 고민하기 시작한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해야 한다/하면 안 된다'는 단순한 답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택하든 아이를 함께 걷는 것의 중요성일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깊었던 만큼, 그 이별도 함께 겪는 것이 아이의 마음을 덜어주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 원문 발췌
할아버지만 만나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초등학생 손녀. 발인 전 마지막 인사에 함께 들어가게 할지 말지 고민되는데, 충격이 클까봐 못 들어가게 하면 아이가 더 슬퍼할까 싶어요.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