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유독 자주 눈에 띄는 물건이 있다. 배경에 자리 잡고 있던 한 대의 선풍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 곳곳에 나타난다. 그저 배경 소품처럼만 생각했던 그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제대로 '봤다'.
1989년산 국산 가전사의 씽씽 모델. 에어컨이나 에어서큘레이터가 흔하지 않던 시대에, 그것이 집의 더위를 책임지던 물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중 가전을 대표하는 모델 중 하나였다고 본다. 그 세대라면 누구나 유사한 기억 하나쯤 품고 있을, 그런 류의 물건 말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나는 그 정확한 모델을 찾아 헌 물건을 구해왔다. 30년이 넘게 누군가의 집에서 살아온 그 선풍기를. 손에 들었을 때부터 책임감이 느껴졌다.
복원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먼저 30년간 쌓인 먼지부터. 닦고 또 닦아도 끝나지 않는 그 미세한 부스러기들. 외형을 정리한 뒤엔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날개 회전축이 경직되어 있었다. 기어 부분도 마찬가지. 손으로 천천히 움직여보니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랫동안 쉬고 있던 부품들이 깨어나려는 신호였다. 적절한 윤활유를 흠뻑 발라주고, 천천히 손으로 돌려가며 부드럽게 풀어냈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스위치를 눌렀다. 돌아갔다. 세상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잘 돌아간다. 그 순간 뭔가 벅차올랐다. 단순히 '물건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넘어, 한 시대가 살아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어머니에게 이것을 보여드렸을 때 나도 몰랐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시 엄마는 아기인 누나를 업고, 한 시간 20분이 넘는 버스 이동을 감내했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목적지는 *** 지역의 시장. 더위를 유독 많이 타던 누나를 위해서였다. 에어컨도 없던 한여름, 선풍기 하나가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었을지 상상해봤다. 그러한 선택 속의 부모의 마음도, 그 시절 가족이 함께한 여름의 무게도 다시금 명확해졌다.
나는 예전부터 낡은 가전을 고치는 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했고, 시간 낭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느끼는 건, 그것이 단순한 취미나 낭만이 아니라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물건 하나를 되살리는 과정은 곧 그 물건과 함께했던 가족의 시간을 되찾는 행위인 것 같다.
이 선풍기도 마찬가지였다. 복원을 진행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그것을 손으로 만지고, 닦고, 돌려보면서, 그 사진들 뒤에 있던 구체적인 시간들이 선명해졌다. 흐릿한 추억은 복원되고, 잊혀 가던 기억은 다시 살아났다.
30년의 세월이 담긴 선풍기. 아직도 정확하게, 부드럽게 돌아간다.
📌 원문 발췌
그리고 스위치를 눌렀는데... 세상에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잘 돌아갑니다! 그 때 엄마는 어린 누나를 업고 ***까지 1시간 20분이 넘도록 버스를 타고 더위를 많이 타던 누나를 위해 이 선풍기를 사오셨다고 합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