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인이 자신의 과거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나섰다. 그 과정에서 건드린 이름이 세 개였다. 한 명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활동가이고, 한 명은 참여정부의 대통령, 그리고 한 명은 정부의 고위 관계자였다. 모두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의 주장은 이렇게 구체화됐다. 그 활동가에게 방문했을 당시 조언을 받았다고, 대통령이 나중에 용서해줬다고, 고위 관계자가 함께 논의하려 했지만 외출 중이었고 시간이 지난 후 관계가 복원됐다고. 이미 돌아가신 분들로부터 후일담의 승인과 합의를 얻었다는 식의 서술인 것으로 보인다. 고인들 자신이 당시 상황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용서했거나 이해했다는 명시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구조의 역설을 생각해보자. 고인들은 더 이상 발언할 수 없다. 만약 그 주장이 거짓이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누가 검증할 것인가? 정치인의 말이 아무런 외부 확인 없이 관례처럼 흘러다닐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비판자들은 고인을 욕보이는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분이 용서한 것으로 전해진다'며 더 이상의 의문을 멈춘다. 정확히 이것이 이 수법의 설계 원리다.
정치인이 빌려온 세 이름은 모두 한국 민주주의 역사 자체다. 민주화운동, 민주주의 실현, 민주당이라는 역사적 상징이자 도덕적 권위를 지닌다. 그 이름들을 들으면 진보 진영의 도덕적 기준점이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바로 이 도덕적 무게가 침묵을 강제한다. 비판하려는 사람도 의식 밖에서 '과연 그분들을 의심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 하는 질문에 빠진다. 고인을 모욕하는 건 아닐까, 역사를 훼손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망설임이 생긴다. 정치인은 이 심리적 침묵을 정확히 이용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한 글쓴이는 이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거짓인지 참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말의 간교함' 자체가 문제라는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거짓 여부는 검증 가능해야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검증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반박하면 고인을 모욕하는 사람이 되고, 침묵하면 암묵적 동의처럼 읽힌다. 이 악순환 속에서 정치인은 반대의 목소리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된다.
결국 이는 개인의 신뢰성을 넘어 사회 전체의 검증 구조를 훼손하는 일로 보인다. 고인을 증거로 사용하는 순간, 어떤 주장이라도 외부에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남지 않는다. 올바른 반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해명하려 들지 않는 것, 의도를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과거의 잘못을 다시 포장하고 고인을 방패 삼아 변명하는 것보다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 원문 발췌
지금 조류가 뭘 떠들고 다녀도 넋들께서는 맞다 아니다를 보탤 수 없고 틀린 걸 바로잡을 수 없다.
원본 출처: 딴지일보 자유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