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6월 3일. 그날 한 14세 소녀는 부모님의 도시락을 들고 우물가로 나갔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이제 70년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이 날짜를 명확히 기억한다. "6월 3일"이라는 정확한 기억 자체가, 그 사건이 얼마나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흐릿하게 기억하는 반면, 이 할머니의 기억은 경계가 선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붙잡힌 소녀들이 도착한 곳은 ***시의 군부대 막사였다. 그곳에는 12~14세 소녀들 약 40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과 마주해야 하는 일본군은 5천 명. 매일 40명 이상의 군인이 할머니를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규모의 수치는 단순한 전쟁 범죄가 아니라 조직화된 체계였음을 시사한다.
그 체계 내에서 살인도 수행되었다. 저항하는 소녀들에 대한 처벌은 다른 피해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1937년 8월 한 달 동안 15명의 소녀가 300개의 못이 박힌 판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시신은 변소에 버려졌다. 일부는 강제로 시식당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행위들이 조직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공포를 통해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1937년 6월, 할머니와 친구들이 탈출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이틀 만에 다시 포획되었다. 그 후부터의 고문은 이전보다 더 정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에 호스를 물려 복부에 물을 주입한 뒤 판자로 누르는 작업이 반복되었고, 이 과정에서 갈비뼈 골절과 척추 손상이 발생했다고 할머니는 증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주의 주모자를 대라는 압박 아래에서, 새로운 고문 도구가 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작은 바늘이 촘촘히 붙은 기계에 먹물을 묻혀, 소녀들의 입 안, 가슴, 배 아래쪽에 문신을 새겼다고 할머니는 기억하고 있다. 그 문신들은 거의 90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의 피부에 남아 있다. 이 문신은 피해의 물리적 증거인 동시에, 강제 망각을 거부하는 몸의 증언이 되었다.
할머니가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흥미로운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보상금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 사죄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왜 데려다가 우리 여성들을 그렇게 했냐"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고 있다. 70년이 넘게 이 질문을 던졌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거주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남한 중심의 공식 기록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적었다. 할머니의 사례도 국제 사회에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유지해온 기억의 정확성 — 날짜, 이름, 규모, 순서 — 은 역사적 증거로서의 무게를 갖는다. 이것이 계속 반복될 때마다 더욱 명확해지는 현실이 있다. 한쪽은 70년을 기억 속에서 살고, 다른 한쪽은 70년을 침묵 속에서 버티는 비대칭이 지속되고 있다.
📌 원문 발췌
악진 세월을 버틴 ***할머니는 보상금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왜 데려다가 우리 여성들을 그렇게 했냐'고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70년이 넘게 이 질문을 했지만 일본은 아직도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원본 출처: 더쿠 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