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매일 아침 강아지를 산책에 데려나간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담아주고, 간식도 챙긴다. 저녁 시간 소파에 누워 있을 때 강아지가 무릎 위로 올라오면 손가락으로 조근거리며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반려동물을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밥 주고 산책 시키고 스킨십하는, 기본 역할은 모두 해내고 있다.
그런데 뭔가 빠져 있다.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친구가 강아지를 부를 때는 언제나 "야" 또는 "이리와"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름 대신 명령조만 있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목소리는 없다는 의미다. 전체적으로 강아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어 보인다고 글쓴이는 관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도 왜 키우는 거야?"
그렇게 물었을 때 친구의 답변은 예상과 달랐다. 사실 동생이 원래 그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생이 버리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말로 내팽개쳐두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친구는 그 상황이 못마땅해서 "내가 대신 봐줄게"라며 강아지를 받아가기로 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것은 애정으로 선택된 반려가 아니라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순간적인 '위기 구제'였다. 동생이 저지르려던 방치나 유기를 막기 위한,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관계는 "사랑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떠맡게 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은 친구의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산책도, 밥 주기도, 간식도 모두 '해야 할 것'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를 개별한 생명으로 인정하는 행위인데, 친구는 강아지를 '처리해야 할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으로 보인다.
강아지는 밥도 먹고, 산책도 나가고, 스킨십도 받는다. 그것들은 모두 충분하고 필요한 것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름으로 불린다는 단순한 경험이 없다. 매일 밤 누군가의 이름이 부르지 않고 대신 "야"와 명령어만 들을 때, 그것이 그 생명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보면 참 아프다.
흥미롭게도 같은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내팽개치는 상황에서 친구처럼 나서서 대신 돌보는 사람도 드물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는 이미 충분한 책임감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일화는 한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의무감으로 시작된 관계는 정말로 고정된 채로 지속될까. 아니면 함께 있는 시간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의무가 애정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변할 수 있다면 그 계기는 무엇일까. 적어도 이 이야기 속 친구가 강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날이 올까.
📌 원문 발췌
산책 시켜주고 밥 주고... 이름도 안 불러 야 아니면 이리와 이것만 함. 동생이 키우다가 버리려고 해서 데려왔대.
원본 출처: 인스티즈 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