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중반, 음악 팬이라면 누구나 손에 들었던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최신 가요곡을 정기적으로 실은 '최신가요책'인 것으로 보인다. 요즘처럼 유튜브나 음악 스트리밍 앱이 없던 시절, 이 책은 거의 유일한 음악 정보 창구였다. 음반을 살 형편이 안 되거나 새로 나온 노래의 가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펴는 것이 가장 빠른 수단이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는 1년에 여러 번 이 책을 샀던 기억을 꺼냈다. 정확한 횟수는 희미하지만, 꾸준히 구입하던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최신 가요 책을 사다가 가사를 외우던 시절"이라는 표현에서, 그저 정보를 얻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이 얼마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는지를 알 수 있다. 가사를 암기하는 과정 자체가 팬덤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들으면서 손에 들린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눈을 집중하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책의 기능은 가사집 이상이었다. 책의 말미에는 '펜팔란'이라는 섹션이 있었다. 독자들이 주소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올려두고 편지를 주고받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 복무 중이던 남성들에게 이 펜팔란은 외로움을 달래는 귀중한 통로였다는 지적이 있다. 바깥 세상과 단절된 시간 속에서, 이 책을 통해 낯선 사람과 편지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펜팔란은 단순한 섹션을 넘어, 특정 시대의 인간관계 방식을 담은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셈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 이 책은 왜 이렇게 희미할까. PC통신이나 삐삐라는 단어는 종종 회상의 주제로 떠오른다. 90년대 추억글이 하나 올라오면 어김없이 누군가는 "오 PC통신!", "삐삐 부저음!" 같은 댓글을 남긴다. 하지만 최신가요책은 어떤가. 이 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얼마나 널리 읽혔는지와 무관하게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디지털 기록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PC통신과 삐삐는 통신·기술 변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회고의 대상이 되기 쉽다. 반면 책은 물리적 오브제로만 존재했고, 온라인에 그 흔적이 남겨질 이유가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집단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지금 이 오브제를 다시 꺼내는 것이 의미 있다. 사실 언급되지 않는 것들, 신문 기사나 매체에 특별히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그 시대의 가장 솔직한 증언자인 경우가 많다. 최신가요책의 사라짐 자체가 디지털 혁명이 얼마나 빠르고 철저했는지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문화의 물질성이 순식간에 지워지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속에, 시대의 진실이 숨어 있다.


📌 원문 발췌

꾸준히 샀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신 가요 책 사다가 가사 외우던 시절...ㅎㅎ 군대 있을 때는 최신 가요 마지막에 있던 펜팔도 했었습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