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 전부터 움직이던 인물이 있었다. *** 대령은 계엄 발표가 나오기 이전에 *** 사령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고, 곧 다가올 계엄에 대한 사전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법정에서 공개된 기록들을 통해 알려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 회의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 대령이 사전에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것으로 전해진다.

계엄이 공식 선포되자, *** 대령의 다음 행동은 빨랐다. 그는 수방사 지휘부에 장갑차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장에 투입될 병력의 이동을 위해서는 기계화 장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 작전에서 장갑차와 같은 중장비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작전 자체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요소다.

하지만 수방사 지휘부의 답변은 거절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기술적이었다. 백미러가 없고 차폭이 크다는 것. 서울 시내를 다니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제시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거절이 단순한 기술적 사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수방사 지휘부는 실질적으로 현장 지휘관의 작전 계획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들의 결정이 그 다음의 모든 상황을 규정했다는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 대령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장갑차가 출동 못하면 저희 병력 이동 문제가 되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는 작년 여름 군사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그의 발언으로 전해진다. 기계화 장비 없이는 작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지휘 체계 내에서 자신의 권한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간극을 솔직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과 몇 시간 뒤, 국회로는 병력이 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법원에 제출된 공소장을 보면 그 규모와 과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1경비단 본부 소속 병력 수십 명이 무장한 채 국회로 출동했고, 그 예하 35특임대대 병력 수십 명이 12월 4일 새벽 1시 이전에 국회 경내로 침투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경비단 2특임대대의 대테러 초동조치 부대도 자정 이전에 국회에 도착해 침투를 시도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현장에서는 시민들의 제지가 있었다. 국회 침투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간다. 상황은 더 빠르게 전개됐다. 오전 1시 35분경과 1시 46분경, *** 작전 지휘관은 병력 10명을 국회 경내로 진입시키려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진입 직후 즉시 철수 지시가 전달됐다. 철수 신호는 *** 대령으로부터 왔다. 국회 비상계엄 해제 의결이 가결되었다는 통보였다. 이 순간의 대화 내용은 통화 녹음으로 기록되었고, 이후 이진우 사령관 군사재판에서 법정에 그대로 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모든 과정—사전 회의, 거절, 반발, 강행, 시민 저지, 해제 의결, 철수—이 한 밤사이에 펼쳐진 일련의 사건이었다. 1월 13일 내란우두머리 공판에서는 공소장 내용이 생중계되며 공개되었다. 이제 이들 순간들은 법정 기록으로 영구히 남겨졌다.


📌 원문 발췌

***이 '장갑차가 출동 못하면 저희 병력 이동 문제가 되고 할 수 있는게 없다'고 했다. 공소장에는 1경비단·35특임대대 병력이 12월 4일 01시 이전 국회 경내에 침투된 것이 명시되어 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