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을 받기 시작한 처음엔 그냥 고마운 줄 알았다. 시어머니가 자주 챙겨주는 반찬들은 한때 시댁이 내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원할 때쯤이면 예상 밖의 반찬이 도착했다. 남편도 나도 그 음식을 자주 먹지는 않는데, 계속 들어온다. 내가 달란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주고 싶은 것"만 계속 나타났을 뿐이었다. 한 번에 담아오는 양도 항상 과했다.

거절을 시도해 본 적도 있다. 괜찮다고, 양이 충분하다고 손을 들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강제로 더 담겨 나왔다. 받는 입장에서 아무리 거절을 해도 관철되지 않는 일방적 구조였다.

시댁에서 받는 물건을 거절하는 것은 특이한 무게감이 있다. 무례로 읽혀버리거나, "우리 아들 밥상 챙기려고 하는데 뭐 하는 거냐"는 식으로 상처가 되기 쉽다. 이 비대칭한 권력 구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받는 것뿐이었다. 거절이 자동으로 죄책감과 연결되는 관계인 셈이었다.

반찬들은 냉장고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언제 먹어야 할지도 모르면서, 버릴 수도 없어서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호의라고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 어느 순간 부담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들어왔다. 시어머니가 주변사람들에게 나를 두고 "고마움도 모르는 며느리"라고, "뭣도 모르는 며느리"라고 말해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베푼 호의를 받지 못했다고, 온 마음으로 챙겨주는 걸 알아주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말한 그 말들이 연쇄적으로 전달되었을 때, 모든 게 선명해졌다.

이건 사랑도 아니었고, 가족을 돌보는 진정한 마음도 아니었다. 자신이 베푼다는 것을 주변에 알리고, 내가 그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당연시하고, 그 감사가 충분하지 않으면 흉을 보는 — 그것은 일종의 통제였다.

호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받는 사람의 필요와는 무관하게 주는 사람의 의지로만 설계된 행동은, 상대방의 감사와 복종을 강제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특히 거절 자체가 무례로 읽혀버리는 시댁이라는 맥락에서는 그 구조가 더욱 강해진다. 받는 쪽은 원치 않아도 받아야 하고, 감사해야 하고, 그 감사가 부족하면 "나쁜 며느리"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글쓴이도 아들을 키우고 있다. 자신이 나중에 호의를 베풀 때, 이런 식의 '일방적 강제'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한 가지를 묻고 있다. 진정한 배려와 호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받는 사람의 필요를 먼저 묻는가 아니면 주는 사람의 의지를 먼저 실행하는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 원문 발췌

내가 달란 적 없음. 당신이 주고 싶은거 줌. 또 너무 많이 줌. 그때 절대적으로 시어머니반찬은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행동이란걸 알았음.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