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도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도덕적 순서를 정하는 데 깊이 익숙하기 때문일 수 있다. 강간범, 사기꾼, 도박꾼, 불륜범, 노숙자, 매춘부라는 낙인이 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먼저 단죄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순수하게 생존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에너지에 먼저 주목해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도덕을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평가 이전에 존재 자체를 직면해보자는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피투성(被投性)'이라는 개념이 여기 닿아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 던져져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부자로 태어난 집의 자녀도, 극도의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노숙자도, 누군가의 피해자도 누군가의 가해자도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그 투쟁 속에서 모두가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며, 사회가 도덕적으로 악이라 낙인 찍은 사람도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모두가 저마다의 조건 아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함수 비유를 살펴보자. 각자의 삶을 y = ax + b 같은 수식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마다 초기값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행동이라도 그 의미와 영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관찰일 수 있다. 수학에서 함수는 입력값에 따라 출력값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입력값)에 따라 선택과 행동(출력값)이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기부를 통해 사회적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그 기부자도 타인이 알 수 없는 조건 속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사람의 입은 거짓을 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도출되는 함수값은 거짓말할 수 없다는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는 y값과 숨겨진 y값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경외로운가. 함수값이 0인지 1인지, 혹은 더 높은 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함수 자체가 계속 실행되는 그것, 즉 강제로 주어진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행동하며 생존해 나가는 인간의 에너지 자체가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비가 내려 먼지를 씻어내리고, 모래가 서서히 무너지듯, 각 인간이 자신의 조건 속에서 계속해서 함수값을 도출해낼 때 그 과정 자체가 경외로울 수 있다는 관점인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 함수값을 도출해낸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이를 외면하기 때문일 수 있다. 수많은 개인이 가진 다양한 함수들, 각각의 초기값과 조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값만을 요구한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인간들을 단 하나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 그렇게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때, 우리는 각 인간의 투쟁과 그들이 처한 조건의 구체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서로 다른 함수들이 존재하는데도 사회는 모두가 동일한 값을 내보내길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 순간의 반응도 또 다른 함수값이 될 수 있다. 공감할 수도, 반발할 수도, 무관심할 수도 있다. 그 모든 반응이 당신의 조건과 경험 속에서 도출된 결과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수 있다.
📌 원문 발췌
모든 인간은 경외받아 마땅한 삶의 투쟁을 하다 죽는다. 함수가 실행되는 그 자체가 경외로운 것이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