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정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들 모임이 있다.
한 친구가 아이를 낳으면서 자동으로 불참이 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고, 이번 달에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던 입장에서 물어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육아는 아직 초기 단계라서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친구의 제안이 나왔다. 자신의 집으로 모이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신생아 때문에 밖에 나가기 힘들고, 친구들이 집으로 와주면 자신도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육아 중인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제안이고, 남은 친구들 입장에서도 그 친구를 계속 모임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인다.
호의를 베풀겠다는 결정이 자동으로 내려지는 순간이었을 것 같다. 원래 모이던 장소에서 벗어나 먼 거리까지 가겠다고 수락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생아가 있는 환경 속에서 밥을 먹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암묵적 결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알겠어, 너네 집으로 갈게" — 이 정도의 문장으로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호의의 무게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다음 메시지에서 나온 조건은 글쓴이의 예상 밖이었다. 모두 백일해 예방접종을 맞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의료적 필수 요구로 보인다. 신생아를 보호하기 위한 보건학적 근거는 있지만, 글쓴이 입장에서는 이미 충분히 배려했다고 느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시간도 들었다. 거리도 먼 곳이었다. 신생아가 우는 와중에 밥을 먹는 불편함도 있었다. 여기에 의료적 조건까지 — 주사를 맞으라는 요구가 추가된 것이었다.
밥값 문제도 놓칠 수 없다. 친구가 식사비를 내주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룹 대화에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해 배달시키기로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시간과 거리로 배려를 하면서, 호의를 받는 쪽의 추가 보상이 없으면서도 요구사항만 점점 쌓여가는 구조처럼 느껴진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떠오르는 관계 역학의 변화가 있다.
호의를 배풀겠다고 나선 쪽이 호의를 받는 입장의 요청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는 점인 것으로 보인다. 처음 "우리 집으로 와줄래?"라고 물었던 쪽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친구들의 배려로 채워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배려를 받는 방식 자체에 추가 조건을 붙이는 순간, 배려는 의무가 되고, 의무는 관계의 무게중심을 바꾼다는 의미다.
누군가는 이미 말해온다: "아이를 낳으면 친구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고."
이 사연이 그 말의 실제 사례처럼 보이는 이유는, 육아의 어려움을 친구들의 배려로 채우려는 순간이 동시에 그 배려 자체를 새로운 의무와 조건으로 변형시켜 버린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배려는 선택이어야 하는데, 조건이 붙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배려가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다.
글쓴이가 '밖에서 만나자'고 제안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으로 보인다. 친구가 "서운해할 것 같은데"라는 예상이 그 제안을 입 밖으로 못 꺼내게 만들 정도로, 관계의 구조가 이미 바뀌어 버렸다는 의미다. 처음에는 '너를 배려해서 네 집으로 갈게'였다면, 지금은 '네 조건에 맞춰야만 하는 관계'가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친구사이의 무게중심이 한 번 틀어지면, 그것을 다시 맞추는 것은 명시적 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대화 자체가 가장 어려운 것이 친구관계의 진짜 문제가 아닐까 싶다.
📌 원문 발췌
자기집 와주면 안되냐함. 갑자기 오는 친구들 백일해 주사를 다 맞고오라함.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