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끝나고 집에 온 뒤 남편에게 하소연했지만, 정말 답답한 건 따로 있었다.
대학 동기들과의 저녁 자리였다. 그중 한 명은 변함없이 가장 가까웠던 친구였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고 있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내 일상에 대해 요즘 분주하다고 언급했을 때, 분위기가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친구는 "정말 고생하네"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렇게는 못 살 것 같아"라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피곤함을 걱정하는 반응으로 받아들일 테지만, 내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단순히 일상을 말했을 뿐인데, 그 일상이 무언가 "극복해야 할 어려움"으로 낙인찍히는 기분이었다.
그 다음부터 식사 시간 내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여유가 없어 보이네" "피부 톤이 많이 안 좋아졌다"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좀 낫겠지"라며 내 상태를 마치 의사처럼 진찰하듯 훑어갔다. 하나하나의 말은 분명 걱정스러운 톤으로 전달됐지만, 받는 쪽에선 그 과정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넌 지금 힘들어 보여, 넌 지금 힘들어 보여"라는 메시지가 누적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가장 불편했던 순간은 계산할 때였다. 내가 계산을 하겠다고 말하자 친구는 "아니야, 내가 낼게. 넌 요즘 힘들잖아"라며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 다른 동료들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공개적으로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느껴지는 사람"으로 표시당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실제로 가게 매출은 그럭저럭했고, 밥값 정도를 못 내는 형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집에 와서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되짚어봤다. 친구의 모든 발언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큰 메시지로 연결되어 보였다. 각 말 아래에 깔려 있던 건, "내 선택이 맞다는 지적이다. 나는 저런 식으로 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것으로 보인다"라는 무언의 검증 같았다. 혼자 사는 자유로움과 기혼자의 고단함을 은연중에 비교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상대의 희생을 통해 정당화하고 싶은 건 아닐까.
남편은 "그냥 친구가 진짜로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닐까"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 반응이 오히려 더 불편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순수한 마음에서의 걱정이라면, 굳이 공개석상에서? 왜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왜 내 현재 상태를 마치 개선이 필요한 것처럼 짚어야 할까.
선의와 무의식적 우월감은 겉으로는 비슷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받는 쪽의 경험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상대를 안정적으로 세워주는 말이고, 다른 한쪽은 은근히 그 자리에서 낮추는 말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친절의 언어와 비교의 언어는, 겉으로는 거의 구분 불가능하지만 내면의 맥락에선 명확하게 갈린다는 게 이 자리에서 느낀 가장 큰 답답함이었다.
📌 원문 발췌
친구: 아냐 내가 낼게 너 요즘 힘들잖아 다른 애들 다 있는 데서요
원본 출처: 네이트판 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