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여전히 들린다. 특히 당시를 직접 겪지 않았거나 그 시대의 국가폭력으로부터 멀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다. 한 익명 게시판 글쓴이가 이 현상을 묻고 있다. 왜 그렇게 될까.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경험하지 않은 폭력은 기억에서 빠지기 쉽다. 대신 남는 건 경제 성장, 사회 안정, 또는 개인이 체감한 일상의 편안함일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은 역사를 구성한다. 경험하지 않은 일은 역사로 남지 않고, 역사가 되지 못한 것은 향수의 공간에 머물기 쉽다는 역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억'과 '기록'은 다르다. 법원과 국가 위원회가 남긴 것들은 개인의 향수를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증거다.
쿠데타와 학살을 법원이 어떻게 봤는가
1979년 당시 신군부 세력이 상관을 불법 연행하고 군을 장악한 사건(12·12 군사반란)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은 반란 수괴죄로 유죄를 확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유혈 진압(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무력 진압)은 대법원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으로 인정했다는 판결이 확정되어 있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죄목 자체는 유지되었다.
헬기 사격 여부를 둘러싼 법적 공방도 있었다. 당시 인물이 회고록에서 이를 증언한 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기술했다가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되었는데, 1심 법원은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으로 기록된다.
국가폭력이 얼마나 광범위했는가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 영장 없이 수만 명을 군부대로 잡아들여 순화 교육을 실시했다는 기록(이른바 삼청교육대)이 있고, 여기서 사망자도 나왔으며, 최근까지도 국가배상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고문도 체계적이었다는 것이 이후 조사로 확인되었다. 1987년의 고문치사 사건을 비롯해 여러 고문 관련 사건들이 사법부에 기록되어 있다.
학생운동 참여자들을 강제로 군대에 보내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이른바 녹화사업의 경우, 이 과정에서 의문사한 사람들이 있었고,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보와 선택권을 어떻게 통제했는가
1980년 언론사들이 강제로 통폐합되었고, 비판적 언론인들이 대량 해직되었다. 정부가 매일 보도 방향을 지시한 '보도지침'은 1986년 폭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통령 선출도 국민 직선이 아닌 체육관 간접선거로 진행되었다. 1987년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에 대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것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법적 책임이 정말 이행되었는가
재임 중 기업들로부터 조성된 비자금에 대해 2,205억 원의 추징금이 확정되었지만,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주장 속에 상당액이 미납된 채 남겨졌다. 이는 법적으로 확정된 책임이 현실에서 이행되지 않은 사례로, 국민 정서상 큰 반감을 사는 항목이 되었다고 한다.
더 근본적으로, 광주 유혈 진압에 대해 생전에 진정한 사과가 없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광주 시민 쪽에 책임을 돌리는 서술을 한 끝에 출판금지 판결까지 받았다.
지금도 묻는 이유
결국 이 게시글이 던지는 질문은, 개인의 향수와 법적·역사적 기록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닫혀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심리적 토양은 존재할지 몰라도, 법원과 위원회가 남긴 기록들은 그러한 향수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과 없이 떠난 사람이 남긴 빚—법적 추징금, 역사적 책임—이 아직도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이 질문은 되묻는다.
📌 원문 발췌
재임 중 기업들에게서 막대한 비자금을 거둬 2,205억 원 추징금이 확정됐습니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버텼고, 상당액을 내지 않은 채 사망했습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