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봄, 제주도에서 일어난 한 건의 경찰 발포가 역사의 분수령이 됐다. 3월 1일, 3·1절 기념 집회가 열렸다. 경찰의 총에 민간인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항의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에 맞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체포와 고문이 이어졌다. 섬 전체의 긴장이 점점 높아졌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대가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를 습격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의 탄압 중지와 남한 단독 선거 반대를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5월 10일, 총선거가 열렸다. 제주도는 투표율 미달로 3개 선거구 중 2곳이 무효 처리되었다.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였다.
그 이후의 일들은 훨씬 더 처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초까지, 계엄령 아래 진압군은 해안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지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토화 작전이 펼쳐졌다. 마을은 불탔다. 주민들이 대량으로 희생되었다. 역사 기록에 남은 이 7개월 동안, 피해가 가장 집중됐다.
이 사건의 규모를 숫자로 보면 그 비극이 더욱 명확해진다. 정부가 2003년 확정한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는 약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가 약 30만 명이었으니, 열 명 중 한 명이 사라진 것과 같다.
신고된 희생자 중 약 78%가 진압군(군·경·서북청년단)에 의해, 약 13%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가해 주체별 비율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희생자 명부에는 10세 이하 어린이부터 60세 이상 노인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신고조차 되지 않은 실종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4년 9월, 한라산 출입 금지가 풀렸다. 7년 7개월 만에 사건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침묵은 계속됐다.
이후 제주 4·3은 수십 년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조차 어려운 사건이 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연좌제라는 제도적 제약 속에서 자신들의 피해 사실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그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집 안에서만 조용히 기억되었던 역사였다.
국가 차원의 공식 정리는 훨씬 나중에 이루어졌다. 2000년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됐다.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대한 공식 사과가 있었다. 2014년에는 국가추념일로 지정됐다.
이들 조치는 특정 정치 진영만의 주도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정부들이 이 사건의 국가 책임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을 가리지 않는 공식 조치가 이어졌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2021년 특별법 개정 이후, 불법 군사재판으로 수감되었던 인물들의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70년이 넘은 시점에서 법정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