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한국, 두 나라가 걸은 길은 얼마나 달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인물들을 처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사용한 원칙이 '에퓌라시옹 레갈(Épuration légale)', 즉 법적 정화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단순한 처벌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공직 추방, 자산 몰수, 시민권 박탈 등 다층적인 제재가 동반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지도층과 지식인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부역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광범위한 책임 추궁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 하나의 신호가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를 배반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규범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개인의 도덕이라기보다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사회적 약속으로 기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개인 사이의 신뢰 기반이 다시 구성될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한국은 어땠을까.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도 친일파 청산을 위한 제도적 노력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군의 행정부가 개입했고, 당시 한국 내 신흥 권력층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우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1950년의 전쟁이라는 비극이 겹쳤다. 이 모든 요인이 얽히면서, 기대했던 광범위한 청산은 무산되었다고 보인다. 오히려 많은 친일 인물들이 새로운 체제 속에서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다는 역사적 평가가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 당시 한국에서 친일파를 조사·심판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기구의 활동 과정에서 정치적 저항이 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9년 국회 내 분열과 경찰의 습격 사건이 이어졌고, 결국 위원회는 기능을 잃었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단순히 외부 압력만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이 청산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이 구조적 실패가 한국 사회에 심은 것은 무엇일까. 많은 역사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바는 이렇다. 프랑스가 "배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규범을 심었다면, 한국은 정반대의 신호를 무의식중에 전파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라를 팔아도 충분한 권력과 재산을 갖춘다면, 그 이후의 인생은 평탄할 수 있다"는 왜곡된 가치관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적 신뢰를 훼손하는 가장 기본적인 훼손 방식이 아닐까 하는 지적이 있다.

이런 역사적 선택이 현대까지 미친다는 주장이 있다. 한국 사회의 깊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추적해보면, 그 뿌리 중 하나가 바로 "공적 배신에 대한 책임"이라는 규범이 형성되지 못한 데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이 국가를 해친 행동을 했을 때 사회가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역사가, 이후 세대의 신뢰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때마다 친일 청산과 친일 재산 환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이미 70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때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을 이제라도 하자"는 사회적 요청이 계속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있다. 역사적 책임을 다시 묻는 과정 자체가, 늦더라도 "규범"을 복원하려는 신호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국가의 배신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회적 문화가 형성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역사가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원문 발췌

우리도, 해방 직후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제도적 노력이 있었으나, 미군정의 정책과 ***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맞물리면서 처벌은 커녕 이들이 사회 주류로 다시 숨어 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