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사가 만든 GHV-10000. 탑로딩 VTR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 2026년이니 이 기기는 어느새 42년을 살아남았다.
1980년대 초, 국내 전자업체들이 VHS 포맷 경쟁에 뛰어들었을 때, 일부 제조사는 탑로딩 방식 비디오레코더를 내놓았다. 요즘 비디오레코더를 생각하면 대부분 앞쪽에 카세트를 밀어넣는 형태를 떠올리지만, 이 기종은 윗면이 열려서 테이프를 넣는 방식이었다. 투명한 덮개가 있어서 테이프 릴이 돌아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전원을 켜면 테이프 릴 내부에서 작은 주황빛이 켜진다. 초창기 사용자들은 이것을 단순한 장식 조명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광학 센서의 광원인 것으로 보인다. VHS 카세트의 양쪽 끝이 투명하다는 점을 이용한 아주 정교한 메커니즘이었다. 그 빛이 테이프 끝단의 투명부를 통과하면 센서가 감지해, 기기는 테이프의 시작과 끝을 파악한다. 역설적으로, 이 작고 단순해 보이는 램프가 고장나면 전체 기계가 무력해진다.
우측 상단 덮개를 열면 요즘엔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나온다. A부터 H까지 번호 붙은 채널 버튼과 동조용 노브들이 정렬돼 있다. TV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주파수를 수동으로 조정하고 저장하는 장치였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채널을 자동으로 녹화하려면, 사용자가 먼저 손으로 각 채널의 신호를 찾아 노브를 돌려 맞춰두어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뚜껑 안쪽에는 한글로 된 설명까지 인쇄돼 있었다. 지금이라면 앱으로 한 줄이면 되는 일을 위해 기계식 부품과 사용자의 손길이 필요했던 시대다.
이 기계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전원 회로 어딘가가 고장났다. ***에 있는 전자제품 복원 전문점에 맡겼고, 점검과 수리를 거쳐 며칠 뒤 전원부가 살아났다.
그런데 전원이 돌아온다고 기계가 완전히 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40년을 지나온 이 기계에는 또 다른 암살자가 숨어 있었다. 고무벨트의 노후다.
오래된 VCR이 최종적으로 멈추는 이유는 대부분 회로 고장보다는 벨트나 고무 부품의 경화나 신축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80년대 VCR처럼 기계식 구동이 핵심인 제품일수록 더욱 그렇다. 현대 가전은 대부분 전자식 제어인데, 1980년대 VCR은 기계적으로 정교하게 짜인 장치였다. 카세트에서 테이프를 정확하게 풀고 감으려면, 촘촘하게 배치된 고무 벨트들이 여러 모터와 구동축을 연결해야 한 것으로 전해진다. 40년이 지나면서 이 벨트들이 굳어지거나 늘어나면, 가장 먼저 EJECT 기능이 죽고, 그 다음 릴이 구동되지 않는다. 연쇄 붕괴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직접 내부를 열어 노후된 벨트들을 교체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생용 캡스턴 벨트, 테이프를 빨리감고 되감는 릴 구동 벨트들. 고무 부품 하나하나를 검사하고, 도구를 집어 들어 조심스럽게 새 벨트로 교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과정에서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작은 부품 하나의 탄력이 전체 시스템의 생명이었다는 깨달음이 함께였을 테니까.
벨트 교체까지 완료한 후, 필자는 테이프 하나를 넣었다. ***의 1980년대 애니메이션 타이틀이었다.
릴이 돌아간다. 테이프가 풀린다. 자기 헤드가 신호를 읽는다. 화면이 밝혀진다. 42년 전의 기계가 42년 전의 방송 신호를 다시 해석해내는 순간이었다.
1992년생인 필자에게는 그것이 완벽한 타임머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84년에 설계되고, 1980년대 콘텐츠를 자기테이프에 기록한 기기가, 다시금 그 영상을 밝혀내는 경험. 기계 하나가 품고 있던 40년의 시간이 다시 흘러나가는 것 같은 느낌. 복원 과정 내내 느꼈을 희열과, 화면이 켜지는 그 순간의 감동. 단순히 옛 물건을 고쳐낸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되살린 일이 아닐까.
📌 원문 발췌
커다란 VHS 테이프 안에서 테이프가 풀리고 감기면서 기계식 장치들이 일제히 움직여 영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감동이 있습니다.
원본 출처: 클리앙 모두의공원